"철인28호 극장판 - 백주의 잔월" 감상평




총평

일반적으로 "철인 28호"라 하면 거대로봇물의 태동기를 장식한 작품으로서, '슈퍼로봇의 추억과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이리라 기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극장판 애니메이션 "철인 28호"는 그러한 관객의 기대를 철저히 깨고 '일본인의 추억'만을 물씬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시대를 넘어서 다시 부활한 철인 28호에게서는 바다속에 가라앉은 전함 야마토와도 같은 녹슨 군국주의의 냄새만이 났다.


스토리

기본적으로 모든 사건은 주인공 카네다 쇼타로 앞에 또 한명의 카네다 쇼타로가 나타나면서 벌어진다. 철인 28호를 능숙히 조종하는 그는 카네다 박사의 숨겨진 양자. 그는 철인 28호의 현재의 주인이 자신이 아닌 어린 쇼타로라는 데 실망하지만, 일단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린 쇼타로의 형으로서 자리를 잡아간다. 하지만 점차 그의 의중과 그를 둘러싼 이들의 실체가 밝혀지면서 극이 진행된다.



거대 로봇물에는 여러가지 특징이 있겠지만서도, 일단 '거대한 힘'이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그 힘이 상대하는 '적'이 등장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구도가 바탕이 된다. 그럼 극장판 "철인 28호"에서의 '적'은 누구인가? 숨겨진 철인의 힘을 획득하려는 베라네이드 재단? 겉보기에는 그렇게 설정되어 있지만, (그리고 사실 30% 정도는 맞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작품의 논조 상으로 볼 때 철인 28호의 진정한 적은 '시대의 변화'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이제는 필요 없어진, 그저 위험한 폭발물일 뿐인 철인,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리 저리 몸을 맡겨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스스로 사라지는 것 만이 마지막 남은 선택인 철인과 그러한 사실에 분노하는 카네다 쇼타로... 그래서 과거를 회상시키는 폐허에 오히려 환희를 느끼는 그이지만, 오히려 그 자신이야말로 진정 이제는 필요 없어진 존재였던 것이 아닐까? 전쟁이 끝난 줄도 모르고 십여년을 살다 현실에 복귀한 복귀병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러한 그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결국 과거의 망령 카네다 쇼타로는 철인을 포기하고 스스로 과거의 삭제를 택하면서, 어린 쇼타로에게 '너의 조종간으로 새 시대를 살아갈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철인 28호"라는 작품은 단순히 이제 시대가 변했음을 말하려는 진취적인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구도를 통해 잊혀져가는 과거의 '대일본'의 추억을 아름답게 묘사하려 애쓰는 전형적인 극우주의의 작태를 보여주고 있다. 덕분에 거대로봇물의 추억을 기대하며 이 작품을 관람한 많은 이들은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거꾸로, "전후의 일본인들이 마음의 상처를 이겨내기 위해 어째서 거대로봇물을 필요로 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첨언

애니메이션 역사상에서 거대로봇물은 단순한 '장르'를 넘어서서 하나의 커다란 문화적 흐름, 독자적인 문화 코드를 형성하고 있다. 거대로봇물은 그저 유년기의 소년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아이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세계에 영향을 미치고 하나의 시대정신을 만들며 수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문화산업의 첨병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창작자들이 여전히 계속 우리만의 거대로봇물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는 이유도 그런 점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밑바탕이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부실할 수밖에 없다. 우리만의 거대로봇물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기 전에,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거대로봇은 왜 필요한지, 정말 필요한 것인지, 그렇다면 우리의 거대로봇은 어떠한 사상적 바탕 위에서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를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PS. 작품 관람의 기회를 마련해준 '서울 애니매니아 영상제'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이와 같은 행사가 자주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만약 그렇게 된다면 좀 더 홍보에 신경을 써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더 큰 바람이다.

by 안빈군 | 2007/11/26 22:21 | 만화/애니 | 트랙백(3) | 덧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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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07/11/28 00:06

제목 : 이마가와판 철인 시동!
천년용왕님 덕에 TV시리즈 공식홈피 개장을 알게 되어 냉큼 방문. 철인의 몸통이나 조종기를 모티브로 심플하면서도 분위기 있게 꾸며진 홈페이지 자체도 마음에 들지만, 그야말로 이마가와 감독스러운 노스탤지어 가득하면서도 요즘 풍의 디테일이 살짝살짝 숨어있는 플래쉬 영상이 눈물을 자아낸다. (..............미쳤군) 그나저나 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있는 물건은 27호일까 28호일까 아니면 몬스타일까 (;;......more

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07/11/28 00:06

제목 : 철인 28호 극장판, 상세정보 공개!
WEB 아니메스타일 2006년 11월 10일자 '정보국' 코너에서: 이마가와 야스히로 감독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 의 상영이 드디어 결정되었다. 이번 작품은 2004년에 방영된 TV시리즈 의 설정을 빌려온 오리지널 스토리로, 이마가와 감독이 연출하는 첫번째 극장용 작품이기도 하다. 상영은 2007년 3월부터 신주쿠 무사시노관 등에서 로드쇼. 아래에서는 보도자료에서 인용된 스토리와 해설을 살펴보도록 하자. > 전후(戦後) 부흥의 ......more

Tracked from 잠보니스틱스 at 2007/11/28 00:07

제목 : 극장판 철인 28호 : 백주의 잔월
태평양 전쟁 종결로부터 십여년 뒤의 일본. 소년탐정 카네다 쇼타로는 아버지의 유산인 거대인형병기 철인 28호를 사용하여 수많은 괴사건을 능숙하게 해결해나간다. 그러던 어느날, 평화로운 도쿄 한구석에서 정체모를 불발탄이 발굴되고, 그 폭탄을 노리는 수수께끼의 로봇들까지 나타난다. 괴로봇 세 대의 협공을 받아 위기에 몰리는 철인. 바로 그때, 구일본군 파일럿 차림의 청년 한 사람이 나타나 쇼타로에게서 조종기를 뺏아들고 철인을 조종하기 시작한다. 이......more

Commented by 안빈군 at 2007/11/26 22:31
한편 자막은 누락되거나 잘못 번역된 곳이 많았고, 전체적으로 음영처리도 되어있지 않아 화면이 밝을 때 글자가 보이지 않는 등 문제가 많았다. 다음 번에는 분명히 개선되었으면 함.
Commented by 잠본이 at 2007/11/28 00:10
TV판을 보고 나서 보게 되면 느낌이 또 다른데, 극우라기보다는 과거로의 현실도피라는 말이 더 어울리더군요. 하여튼 로봇배틀을 기대하고 봤다간 피보기 딱 좋은 물건인 건 맞습니다. (PD가 바라는 연출방향이나 예산부족의 압박 등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향으로 갔다고는 하지만 =_=)
Commented by 산들바람 at 2007/12/14 00:52
링크 잡아가유~
Commented by 독거노인 at 2007/12/17 19:01
우홋 멋진글입니다

안빈님하의 글솜씨는 언제봐도 ㅎㄷㄷ
Commented by 밀파크 at 2008/03/08 17:13
과거로의 도피...
글솜씨 정말 멋집니다.
한 번 보고 싶네요, 저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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