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이 감상평은 작품 전반에 대한 다수의 내용 누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총평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 역사상 상당히 눈부신 진전을 이룩한 작품이 나왔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하나의 완성된 작품으로서는 부족함을 보여준 아쉬운 애니메이션. 볼 때는 여러가지로 탄성을 내지를 정도로 훌륭한 느낌이었지만, 김빠지는 스토리 때문에 정작 작품을 곱씹을수록 나빴던 부분만 생각이 나는 건 너무 아쉽다.
가장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역시 스토리. 관객들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기술력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보러 극장을 찾지는 않는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재미와 감동"인데, 재미는 100점 만점에 75점 정도, 감동은 40점 정도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라는 핑계로 이런 평가를 피해갈 수는 없을 것이다.
비쥬얼
일단 UFO의 등장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첫 장면부터, 노란 색 낙엽들로 대표되는 화사한 색감의 배경 묘사, 현실감 가득한 교정, 그림자탐정이 인도하는 기괴한 세계로의 환상적인 속도감, 기타 수많은 장면들에서 요즘 관객들의 눈에 뒤쳐지지 않는 비쥬얼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부분들에서만큼은 "아치와 씨팍"을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한국 애니메이션이 이제 기술적인 부분들은 확실히 현실을 따라잡고 있구나" 하는 확신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부분에서 3D가 도입된 것도 눈에 띄는데, 대부분 긍정적인 결과물을 보여주었다는 느낌.
반면에 캐릭터 디자인은 다소 밍숭맹숭하다. 그나마 가장 나은 것이 여우 상태의 여우비이고, (꽤 귀엽다!) 귀염둥이 역할이어야 할 외계인들은 오히려 딱히 필이 오지 않는 촌스러운 느낌이다. 특히 황금이와 강선생님의 경우, 아무런 이렇다할 매력이 없는 - 마치 초심자가 그린 것 같은 - 예전 한국 애니메이션들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내용 상 그다지 세련되지 않은 캐릭터들이라고 해도 좀 더 보기 좋은 느낌을 내줄 순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판타지
이성강 감독의 전작 "마리 이야기"에서도 그랬지만, "천년여우 여우비" 역시 비교적 훌륭한 판타지 색깔을 보여주고 있다.
관객의 눈을 즐겁게 하는 판타지는 구미호라거나 외계인 등의 기본 설정이 아닌, 주변의 자잘한 설정들에서 나온다. 예를 들어 비밀 아지트에서 여우비가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용하는 서랍 계단은 참신하면서도 위트있는 설정이라서 좋았다. 비가 오면 물을 쏟아내야 하는 세수대야 모양의 구름요정도 재미있었다. 초반부에 방귀의 힘으로 움직이는 듯한 UFO의 모습도 나름대로 신선했다.
한편 '참새(?)화 된 버스'가 나오는 씬은 그 자체로 이미 토토로의 창의성을 베낀 것 아니냐 하는 비난을 듣는 것이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 (실제로도 그 점이 이미 기사화 되었다.) 그 정도는 알았을텐데 왜 꼭 그런 장면을 넣어야 했을까.
개그
아이들을 의식하고 만든 애니메이션인 만큼 작품 곳곳에서 감칠맛 나는 개그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초반부의 UFO 추락 씬은 무척이나 굉장하다고 느꼈다. 따귀 때리는 씬도 비교적 재미있게 잘 쓰여진 시나리오였다.
여우비 어머니(?)에게 들이대려고 말끔하게 머리빗고 나온 강선생도 나름대로 코믹하고 좋았다. 단, 어린이들 시각에 맞추기 위해서인지 "여우비를 체조계로!" 라는 모토로 마무리짓고 만 것은 아쉬운 부분. 물론 그 얘기는 "계속 관계를 유지해줘요" 라는 의도의 얘기였겠지만.
스토리 - 아, 스토리!
반면에 스토리는 산만함 그 자체이다. 스토리 흐름에 필연성이 떨어지는 부분 투성이인 것과 더불어, 몇몇 장면은 무척 실망스럽기도 했다. 어떤 점들이 나빴는지 등급을 매겨 체크해보았다.
[---] 코미디언이 되고 싶다는 황금이.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60년 전에도 안 통했을 것 같은 유치한 노래와 댄스였다. 설마 "이렇게 하면 왕따 된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적 설정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좀 더 웃음이 나오는 장면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까? "너같은 녀석은 세상이 몰라주는 게 당연해!"라는 느낌이 되어서야 관객의 감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 학교에 들러붙은 말썽요를 되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학교에 직접 들어간 여우비였지만, 말썽요를 돌려받기 위한 일에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지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다. 사냥개들에게 위기에 몰린 인형소녀와 말썽요에게 도움을 주는 장면이 있긴 한데 이것을 그러한 노력으로 보긴 어렵고, 실제로 말썽요가 돌아간 것은 "(무려 자신이 일으킨) 버스사고가 난 난리통에 동료들에게 붙잡혀서" 였다. 작품을 산만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
[---] 초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우주인 가족은 일단은 여우비가 학교에 가게 만드는 역할을 했지만, 그 이후 극중에서 존재 의미를 상실해버려 클라이맥스에서 라스트씬에 이르기까지 그냥 사라져버렸다. 이 부분이 "천년여우 여우비"라는 작품을 산만하게 만들고 있는 요인 두 번째.
[-] 구미호 사냥꾼은 중반까지 비교적 강력한 적으로서 묘사되지만, 위기 메이커 역할만 할 뿐 아무런 스토리적 결말 없이 우스꽝스럽게 퇴장해버리고 만다.
[---] 그림자 탐정은 자신이 영혼을 갖기 위해서 여우비를 이용하였다. 하지만 어느 장면을 보더라도 "그림자 탐정이 번거롭게 여우비를 시키지 않고 직접 사람에게서 영혼을 뺏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전후 상황을 판단해보면 구미호에게만 인간의 영혼을 빼앗는 모종의 능력이 있어야 이야기가 되는데, 황금이가 영혼을 빼앗길 때의 상황은 그냥 서 있다가 기계에게 영혼을 빼앗길 뻔한 것 뿐이다. 그렇다면 여우비가 주문을 외워 기계를 작동시킬 때 구미호의 능력을 계약(?)한 것이라고 잘 설명을 해주던가 해야 할 텐데, 별로 그런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어설픈 욕구를 가진 그림자 탐정의 존재는 마지막 씬까지 계속해서 작품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다.
[---] 영혼들의 세계라는 "카나바"라는 곳은 어떤 곳인가? 작중 설명에 의하면 영혼들이 쉬어가는 곳이라고 한다. 쉬어간다고는 하지만 쉬어가려면 몸으로부터 떨어져야 하는 바, 결국 죽어야 갈 수 있는 곳이고 쉬운 말로 "저승"이라는 말이 된다. 처음에는 중간 단계로서의 연옥 정도의 개념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여우비의 영혼이 이 곳을 떠난 후 다시 환생하는 장면으로 보아 정확히 "저승"이라는 개념이 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사실 굳이 "같은 수의 영혼을 유지"할 필요는 별로 없어보인다. 누가 죽어야만 누가 태어난다거나 하는 것도 현실성이 없고, 세계에 죽고 태어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수를 맞추고 있단 말인가. 실제로 여우비도 후에 아무렇지도 않게 금방 환생하도록 보내주는 걸 보면 좀 어이가 없다.
그럼 왜 이런 설정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나름대로 추측이 가능하다. '대신 희생'하는 감동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등가 교환'이라는 공식이 성립했어야 하는데, 이것을 삼바바들이 직접 요구하면 잔혹하기만 하고 여우비의 선택이 빛이 바래게 된다. 따라서 "수를 유지" 라는 간접적인 조건으로 제시하고 여우비가 이를 능동적으로 선택하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인위적인 설정은 결국 그다지 감동을 주지 못했다.
이런 맥락에서 작품의 흐름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여우비가 인간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는 한 남자애를 좋아하게 됐는데, 그 남자애는 그림자요괴의 얼빠진 음모와 사냥꾼의 등장 등 각종 우연이 겹쳐서 죽게 될 위기에 처하지만, 실은 원래 그 때쯤 죽을 운명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여우비는 남자애 대신 자신의 죽음을 택하지만 실은 별로 대신 죽지 않아도 되었다. 어쨌든 그 결과 남자애는 계속 살게 되었고, 여우비는 시간이 지나 인간으로 환생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 외계인들 때문이었지만, 별로 상관없었던 듯한 느낌도 든다..."
이것이 "천년여우 여우비"의 스토리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들의 전말이다. 아무리 장난스런 개그들을 이리저리 장식해 놓아도, 전체 틀이 맛깔스럽지 못하면 빛이 바래버리고 만다.
> 결정타를 날린 깔끔하지 못한 마무리
극장용 작품의 승부의 50%는 마무리 씬을 얼마나 맛깔스럽게 하느냐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뒷맛이 좋아야 입소문이 잘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년여우 여우비"는 스토리에 몰입이 안되는 상황에서 "어, 어떻게 된 거야?" 라는 느낌으로 급박하게 마지막 씬을 그려냈고, 이후 이어지는 엔딩 크레디트도 아주 밋밋하기 그지 없었다. 전반적으로 상당히 고무적인 애니메이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점 때문에 뒷맛이 좋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 만약 엔딩 부분을 다시 만든다면?
전체적으로 작품을 되짚어보니 "천년여우 여우비"의 가장 큰 실수는, 감동을 만들어보려고 무리하게 다크 엔딩(?)을 고집했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사실 금이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도 부실한 차에 여우비가 희생한다고 해서 굉장한 감동을 얻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게다가 프롤로그를 기억해볼 때 여우비의 죽음으로 구미호는 아마도 멸절하고 만 듯 하다.
만약, 여우비의 헌신의 투쟁을 통해 저승에서 삼바바들을 설득하고 금이의 영혼과 함께 귀환을 했다면 어떨까. 금이가 죽을 운명이었다느니 영혼의 수를 유지해야 한다느니 하는 억지스러움도 없어지고 (단순히 저승에 온 자를 되돌려보낼 수는 없다고 하다가 적당한 조건으로 예외를 인정해주면 된다. 어설프게 포효하다 사라진 그림자요괴의 퇴치 같은 걸 조건으로 이용했으면 어땠을까.) 구미호도 살아남아 전설을 이어가고, 사냥꾼은 역시 구미호는 존재한다고 주절거리고, 꽤 괜찮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지 않을까 싶다.
음악
양방언 씨가 음악 전반을 맡은 것 만으로도 화제였던 작품이기에, 음악은 훌륭한 축에 속한다. (OST를 바로 구입하려 찾아보게 만들 정도로 완성도 있는 음악이었다. 단, 매장에 준비되어 있지 않아 구입에는 실패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결정적 멜로디'가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점. 화려하고 분위기 있기는 하지만 쉽게 기억되지는 않는 점이 아쉽다.
성우
손예진 씨의 연기는 간간이 다소 거슬리긴 했지만, 그렇다고 듣기 힘든 수준도 아니었다. 강선생님의 경우도 그렇지만, 오히려 연극적이지 않아서 무난한 부분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문제가 있다면 '10살 아이'로서의 목소리 연기는 아니었다는 부분일 것이다. 일반적인 프로 성우라면 목소리를 좀 앳돼보이게 하기 위한 모종의 노력을 하는데, 그런 점이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아치와 씨팍"에서의 오인용의 등장도 그렇고, 본인은 비전문 성우들의 기용에 대해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높이 사는 편이다. 하지만 "오세암"에서 보여줬던 전문 성우의 강력함도 매우 좋아한다. 비전문 성우들을 기용한 이유가 홍보효과 때문이라면, 좀 더 관객몰이를 해서 홍보 걱정 없이 좋은 전문 성우들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시대를 앞당기면 될 것 아니겠는가. :)
마무리
비록 만족스러운 감상평을 쓰지는 못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몇가지 요소만 고치고 나왔으면 거의 100점 만점의 가족용 애니메이션이 나올 뻔한 것이 아닌가. 늘상 하는 얘기로 "한국 애니는 시체를 쌓고 쌓아 강을 건너는 작업 중이다" 라는 농담을 자주 하는데, 오늘 느낀 것은 이제 시체가 제법 쌓였다는 것이다. 곧 한국 애니 부활의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