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나오려면?

이번에 여우비를 보면서도 느낀 거지만,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나오면 늘 내용이나 기대치와 상관없이 일단 평가를 위해 달려가서 감상하고, 아쉬운 점을 적고, 다음엔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이 나오기를 기원한다.

과연 어떤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나와야 이 짓을 그만 할 수 있을까?

과연 어떤 극장판 애니메이션이 나와야 평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재미와 감동을 느끼기 위해서 극장을 찾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시체를 쌓아야 강을 건널 수 있는 것일까? 과연 건널 수 있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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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대로 감동을 주는 시나리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서도 일단 가장 기본은 시나리오다. 시나리오가 완벽하면 비록 캐릭터나 배경이 좀 못나도, 비록 성우 연기가 그렇게 뛰어나지 못해도, 우리는 "이제야 제대로 된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며 환호하게 될 것이다. 관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진정으로 가슴이 뛰게 만들어야만 한다. 근래 들어 한국 영화들은 꽤 멋진 시나리오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은 왜 그게 아직도 안 되고 있는 것일까?

1) 발상의 문제

첫번째 문제는 작품 기획에 대한 접근법에 있는 것 같다. 영화쪽에서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면, 우선 "이런 건 재미있지 않을까" 하는 다양한 모티브를 가진 시나리오들이 쏟아지고 그 중에서 수작이 채택되는 형태로 진행된다. 때로는 만화 등이 인기를 얻어 영화화 되기도 하고, 때로는 영화 감독의 개인적인 욕망으로 기획되는 영화들도 있다. 아무튼 "이런 영화를 만들어보자"의 출발점은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다" 라는 욕망에 있다.

반면 애니메이션계는 먼저 타겟층과 스폰서 등을 고려해 제작 계획이 잡히고 작품 컨셉이 정해진 뒤 그에 맞춰 적당한 시나리오를 완성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관행인 듯 하다. 워낙 애니메이션의 입지가 좁다 보니 "재밌게 만들면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접근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아동 타겟의 모험물", 혹은 "로봇이나 용이 나오는 작품", 혹은 "(안전빵으로) 고전명작의 재구성" 이라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진실된 마음에서 출발한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청탁받는 이들은 대개 영화판에서 활약하기 위해 펜을 잡은 이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대개 애니메이션적인 상상력이 결여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나오는 시나리오는 "뭔가 말하고자 하는 깊은 맛이 결여된 몇십분간의 이야기 덩어리"일 뿐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해결책은 없다. 진실된 재미에서 출발한 최고의 시나리오가 나와서 자본줄을 만나기만 하면 된다. 혹은 시나리오를 청탁받는 이가 천재적 자질을 발휘하여 그 빈 부분을 채워줄 수 있어도 좋다. 그 기적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2) 시나리오 감각

"원더풀데이즈"가 시나리오를 100여번 이상 수정했다고 했지만, 결과를 보면 별로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사실 "원더풀데이즈"라는 작품 자체는 어느 정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있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시나리오 감각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 뿐이다. "천년여우 여우비"도 상황이 비슷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단은 시나리오 사전 검증에 좀 더 많은 프로 시나리오 작가들이 참여하는 체제가 되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프로 시나리오 작가들이라고 해서 완벽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 이들은 위에서 말했듯이 '애니에는 문외한'적인 또다른 문제를 갖고 있다 - 결국은 최종 결정을 내리는 감독의 능력에 기댈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

3) 기본 방향 설정의 문제

지금껏 나온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 중에 시나리오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느냐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개인적으로 "오세암"이나 "마리이야기" 등은 하나의 제대로 된 이야기 구조를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이들 작품은 역시 '시체'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는가?

우선은 재미가 떨어졌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흥행이 저조했기 때문이다.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누군가가 파이를 크게 만들어주기를 기다리는 상태, 꽃이 피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작품에 있어 "일단은 대중성, 흥행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줘" 라는 굴레로 작용한다. 즉, 아직은 작가주의에 치중한 작품을 내어놓을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격은 좀 다르지만 "아치와 씨팍" 역시 방향 설정의 문제에서 패배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현 상태에서 가장 바람직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방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기본 컨셉 만으로도 보고 싶어지는 내용 (방향성의 문제. 작가주의 no)
- 기본적으로는 풍부한 판타지와 강한 코믹을 지닌 가족용 애니메이션
-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고 시나리오가 튼튼해서 어른들도 보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
- 결과적으로 아기자기하고 감동적이어서 연인들이 보기에도 무리가 없는 좋은 작품

요약하자면 "지브리 형 작품"에 가까운 형태가 되겠다. 그렇다고 너무 그 쪽 스타일을 의식하는 것도 그렇고, 개인적으로는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같은 것들도 어느 정도 저런 조건에 부합하는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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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전문 캐릭터 디자이너의 부재

두번째는 캐릭터 디자인. 더 이상 이야기 전달 역할만 하는 캐릭터는 사절이다. 배우가 멋있어야 홀딱 빠져서 영화를 보지 않겠는가.

1) 숙련된 손맛의 문제

캐릭터의 그림체에서 느낄 수 있는 완성도와 손맛은, 오랜 시간 인물 그림을 그려본 사람에 의해서만 나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개 '만화가' 생활을 경험해본 이들의 역할이다. 하지만 한국의 만화시장은 거의 죽어있고, 자신의 그림체로 유명해질 수 있을 만큼 의지와 신념으로 오랜 시간 만화가 생활을 버티는 작가들이 드물다. 더욱이 만화가들은 자신의 만화가 애니화 되지 않는 이상, 일반적으로 '캐릭터 디자이너'로서 활동해볼 기회를 얻기 힘든 것이 관행이다. 캐릭터 디자이너는 대개 애니메이션 제작 프로덕션의 원화감독 등이 하고 있지 않나 싶다.

물론 이들도 그림을 꽤 잘 그려낸다. 하지만 캐릭터 디자인이라는 것은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과는 좀 달라서, 관객이 봤을 때 누가 누구인지 개념이 빨리 잡혀야 하고, 스토리상에서의 역할에도 충실하게 개성이 잘 표현되어야 한다. 물론 그림 만으로도 매력이 철철 넘쳐야 한다. 한번 디자인 하면 몇 년을 같은 캐릭터를 그려대야 하는 만화가만큼 이 작업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이는 없을 것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우선 만화시장이 살고, 스타급 만화가의 작품이 그림체를 살려서 애니메이션화 되는 것. 둘째로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그림쟁이가 캐릭터 디자인을 맡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두 번째가 되기 위해서는 일본처럼 그림쟁이들의 네임밸류가 높아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국내 사정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은 큰 네임밸류 없이 게임회사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듯 하다. 이들을 발굴하려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2) 모에 코드의 도입

'모에'라고 하면 대개 오덕후 계열의 하악하악 한 것들을 떠올리게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비쥬얼 면에서의 매력을 궁극적 수준으로 연구, 뿜어내는 것" 정도가 실질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즉 보는 것 만으로도 즐거워 미칠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 비쥬얼 적인 면이라는 것은 배경이나 3D 그런 것이 아닌 캐릭터 디자인에 집중된다.

모에 코드가 극대화 되면 코드 자체를 위해 이야기가 편집되는 형국에 이른다. 예를 들어 미소년/미소녀를 잔뜩 그리기 위한 할렘 배경 구축이라든지, 시츄에이션적으로 모에를 효과적으로 반영하기 위한 세계관 설정이라든지 하는 경우이다. 이렇게 돼서 소위 "그림쟁이 센스"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스토리는 그때 그때 적당히 옴니버스 식으로 같다붙여도 무방해져버린다.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작품이 쓰여지는 것이다.

그런 작품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방식의 창작은 조금은 부정적인 면이 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지나치게 "글쟁이 센스"에 치중되어 그것이 비쥬얼적 표현마저 억누르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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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시스템적인 부분은 한 번에 고쳐질 수 없고, 어느 정도 좋은 작품이 계속 나와서 선전을 해주면서 네임밸류 있는 제작 시스템이 한 군데라도 정착되면 한국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파이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지금 태권브이 리뉴얼판이 50만 관객을 넘었다고 극장용 애니메이션 역대 흥행순위 1위가 되었는데, 기본적으로 100만 단위를 넘어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애니메이션에 스크린을 인색하게 주는 관행만 극복하게 되면 그 순간은 사실 거의 코 앞에 와 있다. 그 동안 너무나도 제대로 된 우리 작품에 굶주렸던 시장이기에, 애니 한류 운운하면서 적극적인 띄워주기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는 날을 기대해본다.
by 안빈군 | 2007/02/01 12:43 | 창작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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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초딩악플러 at 2007/04/17 17:51
요즘 애니메이션은 확실히 환경물에서 벗어나려고 하긴 하지만 그다지 끌리는 애니메이션은 없더군요. TV방송용 애니메이션은 수준을 어린이에게 맞췄다 뿐이지 질 자체는 조금 나아졌다고 봅니다. (물론 재미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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